여행 이야기/도보여행

2013.11.30.단체사진

블루와인 2013. 12. 1. 00:56







산시조님 컷
 

 

7.둘레길정보

)양주 관아 치명성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후 남종삼 요한 성인의 후손을 비롯한 6가구가 덕정리, 우고리, 신암리 등지에 옹기를 구우며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덕정공소[1900, 종현본당 소속], 우골공소[1903, 개성본당 소속], 신암리공소[1907, 개성본당 소속]가 설립되었다. 1930년을 전후하여 성당으로 승격되기도 했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신자 수나 재정적인 문제로 모두 공소로 다시 격하되었다.

이후 양주의 도시 개발과 인구 증가에 따라 덕정성당[1997], 양주 백석성당[2002], 광적성당, 양주2동성당[2003], 고읍동성당[2009]이 설립되었다. 송추공소[2003년 설립] 2010년 성당으로 승격되었고, 신암리공소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기념 성당이 세워지고 성당으로 승격되었으나, 송추성당과 신암리성당은 신자 수와 재정 자립도 면에서 미약한 준본당이다.

 

주소 : 경기 양주시 유양동 507 / 관할 : 의정부교구 양주백석성당

의정부시에서 동두천시에 이르는 3번 국도에서 주내<州內>로 통하는 350번 지방도를 따라 동쪽으로 약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합니다.의정부교구의 치명순교성지로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성원 아오스딩, 김윤오 요한, 권말다, 김마리아, 박서방 등 5분이 치명 순교하신 곳입니다.

김윤호 요한, 권 말다, 김 마리아는 용인에서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홍성원 아오스딩은 포천에서 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양주에서 치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주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서방은 양주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는 지난 2008년「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심포지엄을 통해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양주의 정확한 치명지를 찾았고, 앞으로 치명성지로 가꾸어 나갈 예정입니다.

http://www.ucatholic.or.kr/web/01guide/guide06.asp

 

 

 

 

 

)양주관아지◈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167

◈ 시대: 조선 시대 ◈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141-1

 

 양주의 읍치는 한양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조선 태조 3년 조선의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서울광진구일대인 대동촌으로 옮겼다가 다시 견주의 옛터인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으로 옮긴 후 중종1(1506) 지금의 유양리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 복원한 관아가 위치한 유양리 507번지는 매학당이 있던 곳으로 매학당은 목사의 정청이었다. 매학당은 외동헌과 내동헌이 있었는데 20여 칸의 규모였다. 외동헌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곳이고 내동헌은 그 가족이 생활하던 곳이다. 동헌은 한식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의 정면 7, 측면 3칸의 목조건물이다. 계단을 올라 화강석 기단 위에 주초를 두고 방형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 두공은 간결한 모양을 두 겹으로 얹은 건물이다.

 

② 선정비 : 동헌의 오른편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전임 양주목사들의 송덕비들을 모아 놓았다. 모두 18기인데 이중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이다. 이 비들의 비좌는 화강암으로 새로 만든 것들이다.

 

 http://www.yangju.go.kr/site/tour/sub.do?Key=553

 

어사대비◈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

◈ 시대: 조선 정조 16(1792)

◈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산 33-2

 

 옛 양주관아가 있던 터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왕이 이곳에 들러 활을 쏘았던 일을 기념하고 있다. 조선 정조 16(1792) 왕은 세조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양주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민정을 살핀 후 근처의 사대(射臺 : 활을 쏘는 위치의 발사대)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쏜 뒤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기념하여 당시 양주목사가 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형태만 겨우 갖춘 거북받침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로, 앞면에는어사대하는 글자가 세로로 크게 적혀 있다. 뒷면에 새긴 비문에는 정조가 활을 쏘았던 내용에 이어 왕이 지은 시와 궁궐로 돌아간 후 왕이 내린 말씀을 관아의 오른쪽 벽에 걸어두고 찬양하며, 이 비와 읍지(邑誌)에도 그러한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정조 16(1792)에 세운 비로, 양주 목사 이민채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어사대비는 주내면 유양리 양주 관아터의 뒤편 공터에 위치하고 있다. 맞배지붕을 한 비각 안에 안치되어 보호되고 있다. 정조 16(1792) 9월 왕이 光陵 (세조의 능)에 행차 할 적에 교량이 무너져 동쪽 길을 버리고 행차하여 3일간 민정을 살피고, 사대에서 활을 쏜 후 잔치를 베풀었다. 귀부 등에 장방형 비신공을 마련하고 백색 화강암의 비신을 세웠다. 비신 전면에 많은 탄흔이 있는데 특히 좌, 우 측면 하단부의 피해가 크다. 규모는 총고 186cm,비신 높이 136cm, 너비 55cm, 두께 24cm이다. 

http://www.yangju.go.kr/site/tour/sub.do?Key=545

 

) 유양동[ Yuyang-dong , 維楊洞 ]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법정동.  행정동인 양주1동 관할이다.

양주시 남동부에 위치하며, 주위에 광사동, 산북동, 남방동 및 백석읍과 접한다.

1506(중종1) 고주내면(古州內面) 고읍리(古邑里)에 있었던 양주군의 치소(治所)가 이곳으로 이전된 이래 조선시대 양주군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양주군 읍내면의 서부리, 동부리, 남방리(南坊里)의 각 일부지역이 합쳐 주내면(州內面) 유양리가 되었다. 2000 10월 양주읍 유양리가 되고, 이어 양주군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양주시 양주1동 관할의 유양동이 되었다.

마을 동쪽에 흐르는 중랑천변을 따라 경원선과 3번국도가 통과하고, 가까이에 경원선의 양주역이 있다. 불곡산(佛谷山), 유양폭포, 백화암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양주별산대놀이가 전승되는 고장이다. 양주향교, 승학교(乘學橋), 어사대비, 유양초등학교가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40129&cid=200000000&categoryId=200004184

 

)갈곡리[ Galgok-ri , 葛谷里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에 있는 리()이다.

높이 260m의 노적봉이 있는 산지에 위치한 마을이다. 칡이 많은 골짜기라 하여 칠울 또는 갈곡, 갈등이라 한데서 갈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윗말, 아랫말, 점말, 중간말 등이 있다. 윗말은 갈곡리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아랫말은 갈곡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점말은 독점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중간말은 점말과 아랫말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58315&cid=200000000&categoryId=200004184

-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를 굽던 교우촌 갈곡리 공소(칠울 공소)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갈곡리(葛谷里)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었는지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 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이 마을이야말로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이 마을은 6.25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커다란 고개가 동쪽에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려면 20여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라 한다.

이렇게 험한 첩첩 산중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10년 전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방지거,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본당 칠울 공소가 설립되고 1900 2년 사이에 신자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2년 송도(개성)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된다.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된다. 1934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된다. 1947년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 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된다. 1955 1월 군종 신부님이셨던 에드워드 마 신부님의 도움으로 현재와 같은 공소 성당이 건립되어 노기남 대주교님의 주례로 축성 봉헌되었다. 1963 7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소이다.

법원리 본당이 약 3.5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주일에는 법원리 본당 미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신자들의 영신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http://www.mariasarang.net/sungji_bbs/bbs_view.asp?index=bbs_sungji&page=&no=352

)효촌리[ Hyochon-ri , 孝村里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 있는 리()이다.

산지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거미울, 바깥안말 등이 있다. 거미울은 부근에 수레네미고개가 있으므로 수레 차()자를 붙여 거마동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붙은 이름이다. 바깥안말은 안말 바깥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58799&cid=200000000&categoryId=200004184

 

- 수레네미고개: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거미울에서 파주시 법원읍 오현리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한 고개이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일러두기

 

)휴암 백인걸 선생 묘(休庵 白仁傑 先生 墓)양주시 광적면(廣積面) 효촌리 산 26 지정번호 : 경기기념물 제58호 지정연도 : 1981 7 16

 

 조선중기의 유학자이자 청백리의 한 사람이던 휴암(休庵) 백인걸(1497~1579)선생의 묘이다.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중종 3(1537)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간,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선조 즉위년(1567)에 양주 목사로 있으면서 고을을 잘 다스려 주민들이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선조 12(1579)에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파를 짓는 폐단에 대해 논하고 군비강화를 강조하였다. 묘를 정면으로 하여 왼쪽 편으로는 묘비가 서 있으며, 묘 앞에는 단을 쌓았는데 좌우로 동자상, 망주석, 문인석이 각 1쌍씩 놓여 있다. 묘소 아래에는 신도비(神道碑 :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석등은 모든 부재가 4각으로,3단을 이루는 받침돌 위에 등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화사석은 앞뒷면 2곳에만 창을 내었고, 지붕돌은 부도에서와 같이 윗면의 네 모서리선이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두 작품 모두 고려 공민왕 21(1372)에 세운 것이다.

 

① 묘 : 백인걸(1497~1579)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조광조와 김안국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송인수, 이이, 성흔 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묘는 광적면 효촌 2리 효촌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합장묘이다. 경내에는 홍살문과 하마비 및 신도비각 등이 있고, 서편 구릉에는 휴암 선생의 첫 부인의 묘가 동향하여 있다.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놓여 있다. 상석 앞에는 장대석으로 단을 쌓았는데 단 아래에는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 각 2기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4각의 장명등이 그 중간에 있다. 묘의 규모는 직경 570cm, 높이 170cm이다.

 

② 신도비는 광적면 효존2리 백인걸 묘역 경내에서 묘소로 올라가기 전의 비각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좌와 비신 및 쌍룡이 운문속에서 여의주를 앞발로 마주 잡고 다투는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된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좌는 백색 화강암이며, 비신은 전체에 비문이 있는데 글자 뚜렷하다. 전체적으로 넓고 높직한 비좌와 두께에 비해 넓은 비신은 안정감이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이 썼으며, 김수항이 전액을 썼다. 규모는 비좌높이 57cm, 너비 156cm, 두께 96cm, 비신 높이 180cm, 너비 90 cm, 두께 28cm, 이수 높이 66cm, 너비 105cm, 두께 40cm이다.

 

http://tour1.yangju.go.kr/tour_new/tour/view.jsp?menu=tour&submenu=main¶midx=TL0000587

 

사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산 26번지에 안장되었다. 바로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후일 그의 학통을 계승한 잠곡 김육과 우암 송시열이 그의 신도비를 찬했다. 충숙의 시호가 추서되었고 뒤에 문경(文敬)으로 개시되었다. 남평의 봉산서원(蓬山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1603년 청백리(淸白吏)로 선발되어 기록되었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사상] 그는 허례와 허식을 비판하였고 이는 이이에게로 그대로 이어졌다. 율곡의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정직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당시 동료는 물론 선배와 원로대신들로부터도 미움을 사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고까지 지탄을 받았다. 특히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 등은 율곡을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이의 스승인 백인걸에게도 비판의 칼날이 향했다.이이의 솔직함과 냉정함에 화가 난 이준경은 이이의 스승인 백인걸을 찾아가 항의를 한 일도 있다. 한번은 이준경이 백인걸을 찾아가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 ” 하고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평가]성격은 소탈하고 솔직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이나 성혼, 이준경 등 다른 이들과 있었던 일을 쉽게 외부에 발설하여 물의가 되기도 했다.

 

기타]독립운동가 백정기와 백관수가 그의 후손들이었다. 또한 박정희는 방계 외손으로, 그의 종증조부 백효연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내는 박정희의 15대 외조부이기도 하다.

http://ko.wikipedia.org/wiki/%EB%B0%B1%EC%9D%B8%EA%B1%B8

 

)매곡리[ Maegok-ri , 梅谷里 ]경기도 양주시 남면에 있는 리()이다.

마을 앞으로 비룡천이 흐르며 뒤로는 산지가 자리잡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북구리, 맹골 등이 있다. 북구리는 사촌리 북쪽 골짜기에 있다 하여 북곡리라 불리던 것이 발음이 변화한 것이다. 맹골은 매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큰말이라고도 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58789&cid=200000000&categoryId=200004184

 

- -양주 백수현가옥[ 楊州白壽鉉家屋 ]  남면 휴암로(매곡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주택.

 

중요민속자료 제128. 전하는 바로는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피난할 집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의 일곽만 남아 있다.

「형의 안채와 」형의 행랑채, 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 □형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대청과 건넌방을 남향으로 하였다. 안방과 부엌이 동향한 서변(西邊)이 된다. 대청은 툇마루가 있는 칸반통의 2칸인데 문얼굴을 설치하고 사분합을 달았다.

뒷벽에는 머름을 드린 문얼굴에 바라지 창을 달아 뒷동산을 내다보게 하였다. 대청 동편의 건넌방은 칸 반 크기이다. 안방은 칸반통의 2칸으로 제법 널찍하다. 이는 부엌을 칸반통의 2칸으로 잡은 넓이와 함께 시골집에서는 보기 드문 크기를 지녔다.

2칸 부엌 위로는 고미혀를 받친 다락을 설비하였다. 불발기를 위하여 작은 분합으로 광창을 내었고 안마당쪽으로 멍에에 따라 선반을 매었다. 선반 아래의 부엌벽은 한쪽은 판벽에 널문짝을 달았다. 나머지 칸에는 머름을 드리고 붙박이 살대를 박아 광창을 만들고 그 위 수장에 의지하여 문얼굴을 만들었다. 부엌의 크기와 다락·벽면 구성 등이 이 집의 특색을 이룬다. 하나 더 보기 드문 구조는 부엌 서쪽편으로 2칸 달아내고 그 중의 1칸을 찬방으로 꾸민 것이다. 행랑채는 남면에 7, 꺾이면서 동변에 7칸 합하여 14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면의 1칸이 중문으로 열려 있다.

중문 서편의 방들은 사랑방처럼 만들었으나 단칸통에서 개조되지 않았고, 부엌 1칸이 달려 있다. 중문의 동편으로는 마굿간과 마부의 방이 설치되었고 꺾이면서 부엌 2칸에 뜰아랫방 2, 곳간과 2칸의 내고(內庫)가 차례로 자리 잡았다.

안채 일곽의 이런 구조는 시골의 여염집이라기보다는 사대부의 제택(第宅) 중에서 격조 높은 집이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이는 안채에 말끔하게 다듬은 화강암의 두벌대 설치라던가 사다리꼴의 잘다듬은 주초를 놓았다던가 하는 고급스러운 치장에서도 알 수 있다.

원래 사랑채와 별당채가 더 있었다고 하며 안채·행랑채 밖에 사랑채의 터전이 남아 있다. 사랑채와 별당채가 남아 있다면 이 집은 명품으로 손꼽힐 수 있었을 것이다. 안채 서편에는 우물이, 서북편 언덕 위에는 장독대가 있고 앵두나무 등의 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소박한 대로 원야(園冶)하였던 흔적도 보인다.

 

참고문헌『문화재대관-중요민속자료편 상-(문화재관리국, 198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80621&cid=1648&categoryId=1648

 

)신암리[ Sinam-ri , 神岩里 ] 경기도 양주시 남면에 위치한 리()이다.

감악산(紺岳山)에 있는 산간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부도골, 서뉘골, 주막거리 등이 있다. 부도골은 부두골이라고도 하며 절과 부도가 있다 하여 유래한 지명이다. 서뉘골은 서뉘재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막거리는 주막이 있던 곳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58065&cid=200000000&categoryId=200004184

 

- 의정부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된 교우촌 신암리 성당,공소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2리에 있는 신암리 공소는 모진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온 사람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생겨났던 공소이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신암리(神岩里)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부락이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혜화동)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와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1925년 개성본당 관할의 신암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본격적인 지역복음화의 여정이 시작됐다. 현재는 동두천 성당 관할 공소이다.

개성 본당 관할 공소 :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의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었다. 이 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빠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루도비꼬, 2, 1866~1928) 신부였고, 공소회장은 박성로(朴聖老, 프란치스코) 형제였으며, 공소 신자수는 3백명 정도 되었다. 최창근 신부는 1년에 두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플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1919년에는 최창근 신부의 후임으로 충남 서산에서 사목하던 안학만(安學滿, 루가, 1889-1944) 신부가 제3대 주임신부로 부임해 왔으며, 이때 제2대 공소회장에는 박원문(朴元文, 마르코) 형제가 임명되었다. 안학만 신부는 6년간 개성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1924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1881-1948) 신부가 평북 의주 본당에서 부임해 왔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사제가 개성 본당에서 신암리로 오려면 짐꾼 두 사람과 어른 복사 한 사람을 대동하여 기차를 타고 문산까지 와서는 그곳으로 마중을 나간 공소회장과 합류하여 신암리까지 60리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러한 형편에 1년에 두 차례씩 사제를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하여 240리나 되는 길을 도보로 오간 신암리 공소 회장들의 노고는 나태한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 신암리 준본당 : 2대 공소 회장이던 박원문 형제는 거리상의 불편함 등을 이유로 들어서 서병익 신부의 동의서를 첨부하여 민덕효(閔德孝, Mutel, Gustave-Charles-Marie) 대주교에게 신암리 본당의 설립을 간청하였다. 마침내 이 청이 받아들여져서 1925 3월에 신암리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었으며,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1881-1952, 1910년 서품 20번째 한국사제) 신부를 초대 주임신부로 맞이하였다.

신암리 본당에서 관할한 구역은 연천군, 양주군, 파주군, 포천군, 가평군, 고양군 일대였다. 신암리 본당 신자수는 공소 시절보다 조금 늘어 370명 정도였다. 너무 영세한 지역인지라 자선회를 조직하여 절미운동도 하였으나 신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궁핍은 날로 더해 갔다. 결국 1930 4월에 최 신부는 경기도 안성군 미리내 본당의 주임신부로 떠나고 신암리 본당은 다시 공소로 환원되는 비운을 맞았다.

 

)행주 본당 관할 공소 : 1931년 신암리는 행주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이 시절 행주 본당의 주임신부는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와 그 뒤를 이을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였고, 이재현(李載縣, 베네딕도) 형제가 신암리 공소의 회장으로서 1931년부터 1944년까지 봉사하였다.

 

)덕정리 본당 관할 공소 : 1935년에는 양주군 덕정리에 본당이 생기고, 프랑스에서 온 송세흥(宋世興, 레오) 신부가 주임신부로 오랫동안 본당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고, 신암리 공소에도 매주 와서 성사를 집전하는 등 교우들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송 신부는 1944 3월 갈곡리(葛谷里)로 열병 환자에게 병자 성사를 주러 갔다가 그만 열병에 전염되어 서울에서 치료 받다가 한달 후 선종하였다.

 

)의정부 본당 관할 공소 : 1946년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해 왔다. 김피득 신부는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대지 1,625평을 매입하여 성당을 옮겼다. 이 때부터 신암리 공소는 의정부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6.25때 신암리는 폭격을 당해 초토화 되고 말았다. 1952 9월 의정부 본당에 이계광(李啓光, 요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신암리 공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박복선 형제의 주도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하였다.

 

)동두천 본당 관할 공소 : 우여곡절 속에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곤 하는 끈기있는 신앙을 간직해온 공소는 마침내 1959년에 동두천 본당 소속의 공소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조 : 동두천본당 30년사, 1990, 천주교 동두천 교회]

현재 신암리 공소 관할 구역은 남면과 은현면이며, 신자수는 54세대 약 140명이다. 공소회장은 이정규 베네딕또 형제가 맡고 있다. 자료 수집에 공소회장과 동두천 본당 김 비오 사무장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용, 사진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http://www.mariasarang.net/sungji_bbs/bbs_view.asp?index=bbs_sungji&page=&no=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