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시

그럴 수 없다.. 류시화

그럴 수 없다    

 

             - 류시화



물 속을 들여다보면
물은 내게 무가 되라 한다.
허공을 올려다보면
허공은 또 내게 무심이 되라 한다.
허공을 나는 새는
그저 자취 없음이 되라 한다.


그러나 나는
무가 될 수 없다
무심이 될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나 내 흔적은 남고


그는 내게 피 없는 심장이 되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도둑처럼 밤중에 이슬을 밟고 와서
나더러 옷을 벗으라 하고
내 머리를 바치라 한다.
나더러 나를 버리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내게 물이 되라 하나
나는 불로서 타오르려 한다.
그는 내게 미소가 되라 하지만
그러나 아직 내 안에 큰 울음이 넘쳐난다
그는 내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라 하나
나는 그럴 수 없다 한다.


 

'세상 이야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볕.. 박노해  (0) 2013.10.31
애인..김용택  (0) 2013.10.27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0) 2013.10.15
날개..신경림  (0) 2013.10.15
가을언덕..유안진  (0) 2013.09.29